간만에 엄마. 오늘의 대화

엄마가 집 근처 녹차 생산하는 곳에 용병(..)으로 일하러 다니신지 한달이 조금 넘었군요. 110cc 오토바이(스쿠터가 아닌)로 출퇴근하는, 학력은 없으나 교양과 성깔은 있으신 이 여자분은, 여전히 잘 지내시더이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주륵) 전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

엄마: 모씨는, 연봉 1억이 넘고 5개국어를 하고 명문대 출신인데 가족이 같이 내려왔다가 부인이 여기서 못 살겠다고 애들 데리고 가 버렸데.
르미: 그럼 어떡해?
엄마: 그래서 혼자 산데. 그런거보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건 인성이야. 돈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거지.
르미: 웅?
엄마: 인성에서 자기도 열심히 착하게 사는것도 중요하지만, 인성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라구. 그럼 그런 싸가지 없는 여자를 만나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르미: ;ㅁ;(싸가지라니. 그렇게 심한 말은 잘 쓰지 않잖아!)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말이지. 근데 왜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살다가 대학 나간 애들도 다시는 안들어오려고 하잖아. 그런거 보면,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여기에서 살려면 좀 그렇긴 할거야. 외롭기도 할거구.

냠. 좋은 사람을 찾는 것도 인성의 일부라니. 엄마의 이론은 참... 실용적이구나아. 모든 사람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전폭적인 수용이 힘들긴 하지만, 오래 산 엄마이시니 나쁜 사람을 나보다 많이 보았던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 예전에는 '저 사람의 말에 반응을 보여야지.'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게 어렵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대꾸하는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
르미: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그러니까. 들으면서 '그 상황은 이렇게 전개될거고 네 마음을 그런거구나.'라는게 그냥 예상이되고 파악이 되버려서 대답하기가 싫어지는거야.
르미: 어렵다.
엄마: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게 쉽지가 않아.
르미: 나이가 들어서 소설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멋지다고 하는 말이 있었어. 오래살면 다 아는 것 같아서 뻔한 것 같아서 혹은 필요가 없어보여서 새로운 인풋을 열심히 안하게 된데.
엄마: 정말 그렇다니까! 기운을 엄청나게 내야 반응할 수 있고 입력할 수 있어.
르미: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많아져야 한다고 했나봐. 힘든 일이니까. 근데 그래도 해야되잖아. 안그러면 그냥 꽉막힌 노인네가 되어버린다구. 계속 들어야하고 대화해야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봐야하고...
엄마: 안 그러면 좁아지고 편협해지기 쉽지.이제 그게 얼마나 힘든건지 좀 알겠지?
르미: 웅. 암튼... 기운내삼. 살살 늙어~

차례 음식을 하다보면 5살 때부터 음식을 하신 엄마는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해요.

엄마: 어렸을 때 한번, 난 오빠 나이를 추월하려면 몇 살을 더 먹어야하나 계산해 본 적이 있어.
르미: 풉~
엄마: 그래서 명절이 되니까 오빠한테 가서, 나 한살 더 먹었다! 이랬더니... 오빠도 한살 더 먹었다는거야. 그래서 "왜 왜 왜 오빠도 한살 더 먹은거야!"라고 했었지.
르미: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긴 한데...
엄마: 나이는 같이 먹는거더라고... 아무튼, 그래서 추월하는건 포기했어.
르미: ㅡ.ㅡ;;;

둘째는 둘째셨군.

르미: 엄마 어릴 적에, 식용유 있었어?
엄마: 돼지 비계를 썼지. 돼지 기름을 빼는 때가 있었어. 그래서 기름을 모아두면 하얗게 굳어. 그걸 덜어서 부칠 때 쓰는거야.
르미: 그 때는 그렇게 해도 건강에 해로울 정도는 아니었겠다. 지금 먹는 기름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겠네.
엄마: 그 기름빼고 난 비계가 바삭하고 맛있었거든. 그러면 할머니가 하나씩 입에 물려주었는데, 오빠가 삐쩍 말랐으니까 오빠한테는 기름 조금 남은걸로 주고 나한테는 정말 앙상한걸 주는거야.
르미: 푸하하하
엄마: ...나쁜 할머니.
르미: 풉~
엄마: 하지만 오빠는 바삭거리는걸 더 좋아해서, 입에 물고 같이 부엌을 나서면 바꿔물곤 했지. ^^v

엄마: 우리 할머니는 정말 살림 잘하셨는데.
르미: (도대체... 증조할머니가 살림 잘하셨다는 걸 알 정도면 얼마나 오래 같이 살림을 해댔단 말이냐!) 엄마, 뜨거운 거 왜 그렇게 손으로 집어? 젓가락도 있고 집개도 있고 행주도 있잖아. 왜 그걸 그렇게 버티냐? 뜨거운 걸 잘 견디는 사람이 인간관계나 인생의 고난도 그냥 견뎌버린다잖아. 그래서인지 나이들면 더 잘 버티게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엄마: 할머니가 나 이러는거 보면서 "너도 시집가서 고생 많이 하겠다. 뜨거운거 잘 참는 애들은 시집살이 고되게 한다던데."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시는걸 봤던 기억이 나.
르미: 그러니까 이제 그만 견디라고. 둔해지는 것보다 예민해지는게 나아. 그리고 힘든건 바꾸면 될거 아냐. 지금 청동기 시대 아니거든? 철기 시대도 한참 지났다구요.

아, 저희 엄마 별명이 "청동기시대 부족장"입니다. :)

르미: 그러니까 결론은, 엄마의 외할머니는 살림을 정말 잘 하셨고 그 딸인 할머니는 살림을 엄청나게 못하시고 그 딸인 엄마는 살림을 잘한다는거잖아.
엄마: 그런거야. 살림도 사실 집에 한 사람만 잘하면 되는거니까...
르미: 그,그럼 난 살림 못할 순번이잖아. ;ㅁ;
엄마: 못하잖아.
르미: ㅡ.ㅡ;;;;; 엄마. 나 잘 잘 내쳤어. 자취하면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어!
엄마: 그래서?
르미: 살림의 여왕이 되는거야. 오호호호호호호호~

웃다보니 엄마가 나의 말을 외면하고 거실로 가버리셨다는걸 알게되었죠. 쳇. 암튼 이렇게 차례준비가 끝났던, 어제 이시간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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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잔잔 2006/10/06 18:09 # 답글

    어머니랑 참 정겨워 보이네요. 부러워요 ^^
  • 행인1 2006/10/06 19:31 # 답글

    멋진 별명의 어머님이시네요...^^;
  • 措大 2006/10/06 21:33 # 답글

    ( -_-)/

    ...거참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엌을 어슬렁거리다보면, 아침(우리집은 차례를 안지내기 때문에 차례상 내용물의 아침을 만들어 먹고 명절 기분을 내는데, 그나마도 큰집 차례 시간에 대어가려면 늘 빠듯하더라 --; 이상하지?)에 정신없는 엄마에게 덥썩 잡혀서 산적을 굽는단 말이지. (고기는 우리 집에서 제일 잘 굽는다고 인정받고 있다 --)

    가까스로 아침상을 차리고 나면, 그제서야 어슬렁어슬렁 잠옷만 입고 눈 비비며 누나가 나오지. 그러고 나면 난 아빠에게 끌려 큰집으로 압송되고. (아으) 누나는 마음껏 뒹굴거리며 명절 특선영화를 다 볼 수 있단 말이야. (그리고 집에 돌아온 날 붙잡고 모든 스포일러를 다 터뜨리는 거야)

    ...아 명절연휴는 좋은데, 명절날만큼은 다 싫었다 --; 이젠 세뱃돈도 못받으니 정말 싫군.
  • 응아보이 2006/10/06 23:52 # 답글

    인성에 관한 말씀이 가장 인상깊습니다.
    평소 내 생각과 어긋남 없는.. ㅠ_ㅜ

    완전 공감하고 가요~
  • 야미 2006/10/07 01:31 # 답글

    저도 인성에 관한 말씀에 끄덕끄덕..

    우리집은 식구가 적은 편이어서 온가족이 차례 음식 만들면서 화기애애하답니다.
    간단한 일만 도우시던 아빠께서 처음으로 생선을 구우시고 오늘 차례음식 내올때 생선에서 빛이 난다고 하셔서 모두 웃었어요^^
  • 시마 2006/10/07 15:28 # 답글

    어머님과 참 정겨우세요~
    말씀도 재있게 잘하시고요.^^
  • 나의르미 2006/10/07 17:26 # 답글

    잔잔님// 엄마가 저랑 눈높이를 맞춰 주셔서 그런 것 같아요. ^^

    행인1님// 저 별명은 정말 누구나 인정하는거랍니다. 어찌나 족장같으신지;; 저희 엄마는 정말 '전사' 같으세요. 화나면 정말 무서워요;(날아다니는 접시를 본 적이 있지요. 킁)

    措大님// 아항, 그런거야? 우리집은 우리집이 큰집이어서 아주 난리였는데 이젠 정말 간단해져서 가끔 아쉽던데. 난 제사 많은 집에 시집가는게 꿈이었고 지금도 그래;(역시나 철없는 싱글인거다 ㅡ.ㅡ)

    응아보이님// 저희 엄마 가끔 저런 말씀 하시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용에 모두 동감하지는 않지만 딸에게 저런 이야기를 잔소리같지 않게 할 수 있는건 굉장한 능력이죠... 그건 정말 배우고싶어요.

    야미님// 아아아아아 아버님 너무너무너무 멋있으세요! 킁. 저희 아버지는 친구분들이 아침부터 엄청나게 전화를 거셔서 끌려나갔다가 해 지고 나서 들어오셨다지요. ^^

    시마님//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만날 때마다 더 재미있어요. 시마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바나 2006/10/09 06:39 # 답글

    예전에는 '저 사람의 말에 반응을 보여야지.'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게 어렵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대꾸하는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 <- 라는 르미님 어머님의 말씀,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상대를 통찰하시는 어머님과 달리 저는 그저 귀찮을 뿐이지만요;;
    연휴 잘 보내셨죠? ^^
  • 나의르미 2006/10/09 06:48 # 답글

    바나님// 연휴 잘 보내시었어요? ^^ 저도 언젠가 그걸 알 수 있는 날이 오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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