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 기타 옛날이야기

하루를 묵혀두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초등학교 때 2년간 피아노를 배우며 나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타고난 손의 크기나 힘이 좋아서 눈치보며 대충 연습하다가 선생님이 왔을 때 진지하게 치는 생활을 하다보니 진도는 어찌되었든 실력에 상관없이 앞으로 앞으로.

그러다가 3학년 때, 지나치던 어느 건물에 높이 걸린 '기타'라는 두 글자를 보았을 때, 나는 무슨 영문인지 그 곳으로 그냥 걸어들어갔다는게다. 작은 방, 벽에는 통기타와 클래식 기타가 주욱 걸려있었고 의자와 악보대가 있고 발받침대가 놓여있는 그 곳. 사무실에는 탁자와 소파가 있었다. 통로를 따라 책꽂이가 있었는데 까만 악보피스가 꽂혀있었다. 엄마는 순순히 학원비를 내셨다.

그리고 3일동안 나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른들이 20분이면 따라한다는 스트로크를 치기 위해 3일간 매일 한시간씩 오른손, 스트로크를 연습했다. 엄지 손가락 손톱 아래가 까져서 피가 흘렀다. 나흘째 되던 날 첫 코드를 잡아볼 수 있었다. 약식 C코드. 도미솔도. 도미솔도. 딩 디딩디딩 당 다당다당(첫 연습곡이 4분의 3박자였으므로). C, F, G7, A, Dm, E7...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 학원. 소파에 앉아 나는 이런 저런 학교 이야기를 선생님에게 재잘거렸다. 50분 연습, 두 곡의 합창. 사무실에서의 수다. 그때의 나는 손톱이 자라는 아이였다.

나는 아르페지오에는 영 익숙해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피아노를 배울 때처럼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집념이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에 무언가 배운다는 것은 그래서 한편으로 위험하다. 나는 내 연주를 듣고 다시 다시 다시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무얼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퉁. 줄 하나를 튕기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다시 다시 다시 연습하라는 것일까. 저 소리와 이 소리의 차이가 과연 뭘까.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인생의 챕터2로 들어섰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외할머니가 선물해주셨던 진짜 피아노는, 거의 연주되지 않은 채 몇 년간 방치되다가 둘째 삼촌의 아이들에게 보내졌다. 마지막으로 클래식다운 것을 연주했던 날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세상을 떠나버린 5살짜리 사촌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저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뒤숭숭한 분위기의 어른들 틈에서 빠져나가, 나는 떠나는 애들하고 마지막 순간에 꼭 중요한 대화를 나누더라...고 생각하다가, 다음날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가 맹랑하게도 쉽게 편곡된 쇼팽의 이별곡을 치고는, 쿨쿨 잘 잤다.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된 것은 우연히 반주를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2년 전인가, 불교회 중창 연습을 하면서 노래 두 곡을 골랐는데 듣는 것만으로는 잘 따라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몇몇 있었다. 하나 하나 음을 잡아드리려니 피아노로 가서 그 음을 쳐야했고, 마디마디 잘라서 연습하려하니 녹음된 음악을 트는 것보다 그 부분을 반주하는게 더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선 위에 적힌 코드를 보고 왼손으로 밑음만 대충 잡고 치게 된 것이 결국은 사람도 없는 내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은 계기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왜 스물 네 번째 생일 선물로 혹시 가지고 싶은게 있냐는 엄마의 말씀에 저렴지만 결코 만만하게 살 수 없었던 이 작은 디지털 피아노를 선택했던 것일까.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그아이의 충동.에 가끔은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제 이 시간, 오래간만에 작동법도 기억나지 않는 먼지 가득한 디지털 피아노에 앉아 있다가 실수로 무언가를 눌렀더니 작년 여름에 녹음해 두었던 간단한 가요가 나왔다. 이어폰을 끼고, 피아노를 다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주법이 아닌 클래식으로, 양 손이 각각 정확하게 할 일이 있는 악보를 놓고. 스트로크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어. 아르페지오를 연주할 수 있어야 했어. 그 때, 피아노 위에서 울리는 전화. 그리고 이유없이 떨어지는 차디차고 값싼 눈물. 이것은 그의 문제도 나의 문제도 아닌, 단지 밤에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던게 아닐까. 아주 오랫동안 한 음 한 음에 충실해본 적이 없는 나에 좌절하고 있었으니까.

덧글

  • incipit 2006/10/24 11:45 # 답글

    저도 피아노 다시 치고싶은데..^^;;
    가난한 고학생의 신분으로는 디지털 피아노 하나도 잘 못사겠더라고요.
    큰맘먹고 손을 뻗었다가도 에이 이건 내 사정에 사치지 싶어서. 하하하;
    피아노에 얽힌 기억이 많으신가봐요. :)
  • 나의르미 2006/10/25 16:41 # 답글

    incipit님// 피아노에 관한 기억이 이게 다인것 같아요. :)
  • 앨범이 2006/10/25 17:31 # 답글

    어리실때 악기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부러워요. 전 악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지금은 악기나 그림 암튼 이런 쪽으로 재능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요. 제가 참 손재주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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