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반긴다. 첫 수능 감독의 추억. 학교에서

문짝이 열린다기보다는 떨어지려다 걸린다는 표현이 정확한 오래된 봉고차 조수석에 타서 잘 매어지지 않는 안전벨트 끈을 손으로 잡고 달려간 제주시내의 한 고사장. 간만에 학교를 벗어나나 했더니 울 학교와 비슷한 학교에 감독하러 간다. 교문 앞에 교복을 입은 2,30명의 학생들이 학교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이다. 이곳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아무리 이름을 바꾸어도 여긴 '농고'라고 해야 다들 알아듣는 학교다. 그 교문을 교복을 입은 수험생이 지나고 있었다. 

예쁜 옷 입어도 될텐데, 사복 입어도 될텐데. 입고 나서서 칭찬받기 힘든 교복인데도 수능 시험장에까지 입고 왔구나. 알고보면 실상은 귀차니즘이겠지만 나의 낭만적인 머릿속은 금새 얼마나 이 아이들이 인간적이었나를 기억해냈다. 전문계고생이라고 뭉뚱그려서 미안하다. 그런데 니네, 예쁘다.

1교시, 잠든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 시험 후, 대기실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어느 분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들어가보시니 어때요? 놀라셨죠?" 무슨 소리인가 돌아보니 나의 모교 은사님이다. 선생님은 놀라셨겠죠. 인문계 사립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이들이죠. 그런데요, 전 제 학교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합니다. 라는 말씀을 마음으로 드렸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아이들, 예뻐요.

까짓 담배냄새 좀 풍기면 어떠냐. 잠 좀 자면 어떠냐. 오늘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것 만으로도 우린 대단해. 라고 생각해줬음 좋겠다. 내 제자가 있더라면 손을 꼭 잡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마지막 '00탐구' 선택과목 시간에 이 학생들은 직업탐구 영역을 푼다. 두 과목이나 세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공업과 컴퓨터, 상업에 대한 과목들. 한 반에 4,5명을 제외하고 금새 답안을 나름대로 정리해버렸던 1,2,3교시와 달리 선택과목 시험은 각각의 과목에 배당된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참 공부를 열심히 하고 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학교 다니는 내내 나는 인문계가 전부인 줄 알았어. 그리고 교육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과학을 안배워도 되느니 국사 계열이 많아졌느니 그런 것에만 신경을 썼어. 국, 영, 수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줄 알았어. 그리고 그 기본이 수능 문제라고 생각했어. 사실 우리나라, 나처럼 참을성 없고 성격 나빠도 국, 영, 수만 잘하면 좋은 대학 가긴 해. 근데 난 너희들보다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절대 말 할 수가 없네. 

오늘 너희들 수능 보는 모습 보면서 내가 더 속상하더라. 3학년 때 배우지도 않는 영어, 수학 푸느라고 힘들텐데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문제 하나 하나 읽어보는 모습에 괜히 미안하더라. 우리나라는, 맞아, 인문계 밖에 몰라. 교육 정책도 학원도 신문 기사도 전부 다 그래. 이 시험도 그래. 그냥, 어쩜 괜히 오지랖이 넓어서, 난 오늘 그게 싫더라고.

나도 그렇거든. 난 있잖아. 가끔 영어교사인 내가 왜 중학교 교과서도 읽지 못하는, 아니 그 전에 영어를 지지리도 싫어하는 애들이 가득한 우리학교에서 시간을 땜질하고 있을까 가끔 화가 나. 근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어. 10년을 근무할 수는 없지만 1년을 10년처럼 보낼게. 영어를 가르쳐주다 힘들면 내가 가진 작은 인생 경험이라도 나눠줄게. 잘 해볼게.

그리고 말이야, 그동안 모르는 사이에 너희들도 내공이 생겼을테니까, 집안 사정에 속상했던 것, 돈 없어서 고생했던 것, 성질 못이겨서 망쳐놓은 것, 잘 몰라서 헤매었던 것, 그런 일들 거치면서 분명 더 훌륭해졌을테니까, 그러니까 더 기운내서 세상으로 뛰쳐나갔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좋은 것은 예전에 세상만큼 커보였던 일들이 세상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더라. 내가 단언하건데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세상은 '나'를 반기게 되어 있어.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덧글

  • 야미 2007/11/16 02:11 # 답글

    저도 그 아이들이 무척 예쁘고 대견하게 느껴지네요..
    르미님도 고생많으셨어요
  • greenmovie 2007/11/16 12:27 # 답글

    어유.. 정말 힘들었겠다. 그 힘든 내내 따뜻한 눈망울로 아이들을 지켜준 르미가 있어서 아이들이 그 에너지를 많이 받아먹었을거예요. 내가 수능 관련 읽은 글 중에 가장가장가장 멋있어!!
  • 마른미역 2007/11/17 00:10 # 답글

    찔리네요.
    저도 인문계밖에 몰랐던 것 같아요.
  • 나의르미 2007/11/23 19:54 # 답글

    야미님// 때때로 이런 경험이... 무척이나 소중해요. 저에게 필요하기도 하고.

    greenmovie님// 헤헤. 두꺼운 파카 입고 코 고는 학생을 깨우는데 파카만 흔들리고 애는 꿈쩍않아서 매우 난감했지요.

    마른미역님// 괜찮아요 괜찮아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