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난 사건의 마무리 학교에서

또다시 돈이 사라졌다. 지갑이 털린 것은 물론 속상하지만, 문득 엄청나게 거리가 먼 사람의 물건보다 가까운 사람의 물건이 '비 전문적인' 도적에게 더 쉬운 표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이게 지난번 뜬금없는 영어포스팅의 내용이었다. 머쓱해서 영어로;;;;). 지난번 포스팅에서처럼 나와 수업하는 학생이라면 무언가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기로 결심했던 터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궁금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럼 안되용~"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은 필시 12:00부터 12:20 사이. 열흘째 되던 날, 식사하고 돌아오니 가방이 열려있고 장갑이 바닥에 떨어져있다. 지갑을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갔을 터. 화면을 검색해보니... 내가 아는 학생이 아니다.

결국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내 자리가 문제였군. 물건 간수를 잘 해야겠어. 그러게 제발 사물함 한 칸만 달라구요. 흥.

전교생의 사진을 가져다 누구인지 확인하고 2학년 과 담당 선생님과 그 학생의 담임 선생님께 알렸다. 동영상을 보여드리기 싫어서 화면 하나만 캡쳐해서 인쇄, 두 분께 보여드리고 드르륵 갈아 없앴다. 두 선생님이 나쁜 경찰/좋은 경찰의 역할을 나누고 학생과 상담실로 가셨다. 그리고 두 분은, 교육적이기 위해서는 내가 마지막에 그 학생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씀도 함께.

흐음. 이건 완전 피해자의 입장인걸. 의자에 앉아서 뱅글뱅글 돌면서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나쁜 녀석. 이라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생각하지만 세상에 나쁜 학생은 한 명도 없다고 믿기로 결심한지 아직 채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굳이 그 말을 입밖으로 해야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문득, 고3때 교칙위반을 했다가 담임선생님께 하루종일 혼나고 전학가라는 말을 듣고 엄마가 불려왔던 일이 생각나면서 - 그러게, 나 말이다 - 그 후의 나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물론 나는 삐뚤삐뚤했다. 내가 그렇지 뭐. 라는 생각도 있었고.

잠시 후, 두 선생님이 반성문을 가져다주셨다. 이 달 초에 "여자 선생님"의 가방을 털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워~ 내가 '여자 선생님'? (물론 틀린 말을 아니지만)

문득, 2003년 1.26제언이 기억났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철학자의 말을 예로 들면서 예전에 마을이 아주 작고 사람들이 서로 다 알고 지낼 때에는 사람들이 작은 불행에도 놀라고 위로해주었었다고. 그런데 도시가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지고 정보 전달이 빨라지면서 대 참사를 뉴스에서 보고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글이었다. 아하, 나는 감히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할 필요도, "미워!"라고 할 필요도 없이, "알고지내자."라고 하면 되겠다.

녀석이 나에게로 걸어왔다.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이미 많이 기운 빠진 상태. 혼났고 마음 아팠고, 정신 없었고, 후회했을 터. 그리고 녀석을 보니 문득, 내가 기다리면서 마음이 뒤숭숭했던 것처럼 녀석도 나를 보는 것이 두려울 것 같다.

너 나 알아?

도리도리.

난 르미라고 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어. 1학년에 B군(우리반 실장)과 Y군(1학년 짱, 우리반 체육부장)을 알아? 걔네 담임선생님이야. 이제 나 아는거다.

끄덕끄덕.

남에게 해를 끼치면 그게 남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아는 사람일 수도 있는거고, 피해를 본 사람이 마음을 다쳐서 다른 사람을 해치면 그게 돌고 돌아서 자기한테 올 수도 있어. 믿을 수 없지만 그건 사실이야. 세상이 그래. 큰 실수를 했으니 벌 받아야지. 오늘 혼난거 잊지 말고.

끄덕끄덕.

어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좀 화가 났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

...

이렇게 하자. 1학년에는 너처럼 어떤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충동적으로 실수하는 애들이 있어. 소심하고 약해서 힘들어하는 애들도 있어. 그런 애들이 보이면 네가 챙겨줘. 알겠니?

네.

그리고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걸 보면 그것도 막아줘. 네가 그 담당이야. 너 내년에 3학년이잖아. 나도 내년에 여기 있을거니까 일년동안 잘 해야된다.

네.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네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어. 실수인거지 네가 나쁜 사람인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사실 이 말은, 원래 하려던게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냥 나왔다. 100% 나 스스로 동감하지 않는 말인데도,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쩜 이건 고3때의 나에게 내가 줄기차게 하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많이 느끼는건데, 불량학생 출신이라 좋은 점도 있다. ㅡ.ㅡa

아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OTL.

...애들 땜에 울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젠 애를 울리다니, 크는구나 르미.

대화의 마무리는 새끼 손가락 걸기. 왜 거는지는 둘 다 모르지만 암튼 걸어야 뭔가 끝나는 것 같다.

나중에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잃어버린 돈을 어떻게 하겠냐고. 녀석에게 그 돈을 빌려주어 갚게 하고 나중에 가지고 오라고 할까도 생각했었다고 말씀하셨다.

"괜찮아요. 천천히 받아도 되요. 이젠 아는 사이니까. 제 이름도 외우라고 했어요."

이렇게 "12월 도난사건"은 해결.

(이건 자랑) "르미가 아~~주 가끔은 똘망똘망하군."이라는 말씀을 몇 분께 들었다. 아~~주 라는 말은 안해주면 안되나;;


덧글

  • greenmovie 2007/12/17 02:03 # 답글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하다니.. 이런 몹쓸.. 내 눈에도 눈물 고였어요. 르미는 아주 현명하고 좋은 선생님이야 . 그걸 알면서도.. 지금 글을 쓴 르미의 씁쓸한 심정이 동시에 느껴지니 이런 이율배반 같으니라고. 그 녀석을 내게 보내주면 내가 흠씬 두들겨 패 줄텐데. 르미 파이팅.
  • 쇳조각 2007/12/17 15:40 # 답글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셨군요. ^ ^ 아마 그 학생에게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선생님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잘 지내시죠? :)
  • 야미 2007/12/17 17:14 # 답글

    와...정말 예쁘게 생각하고..예쁘게 말 하세요..
    내가 그 학생과 마주한다면 과연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하면서 암담한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리다가 르미님 글을 보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어요 털썩;
  • 나의르미 2007/12/23 04:28 # 답글

    greenmovie님// 과찬은 마시고... 두들겨 패지도 마시공..;;

    쇳조각님// 안녕하셨어요? 추운데 잘 지내고 계시죠? 이 학생, 저도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야미님// 저 말들의 중간중간에는 뻘쭘한 침묵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현실은 ugly한데 글로 쓰니 그 거친 면들이 덜 드러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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