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어 학교에서

국어실력을 물어본다치자. 신문기자로 품고 있어야 할 실력과 문학가로 품고 있어야 할 실력과 진주심장같은 일기장 블로그를 쓰는 사람의 실력과 이오공감을 불타오르게 하는 사람의 실력은 다르다. 하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법/어휘 선택 수준의 '하한선' 같은 것이 존재하고 그것과 언뜻 상반되는 것 같지만 이렇게 저렇게 감성적인 '스타일'이 있다. 전자를 돈이라 하고 후자를 소비방식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영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돼지저금통에 크든 작든 돈을 모으자고 호소하는 것. 경제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을 모두 펀드매니저 양성 과정에 넣거나, 채권과 부동산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는 것이 과연 급할까? 라는게 인수위의 생각에 대한 내 대답이다.

어린데 경제를 잘 읽는 애들은 분명히 있다. 그 애들은 왕성한 호기심과 적성이 있는 애들이다. 그걸 보고 부러워서 피아노 천재인 자식을 경제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도울래요! 라고 하는 아이에게 '부자가 되어 병원을 사렴.'이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만약 그 아이의 친구가 된다면, 그 부모를 말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교육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아이를 피아니스트로 만들고, 경제학자가 되고 싶은 아이를 경제학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된다고 해서 통장 정리를 못하거나 경제학자가 되었다고 해서 음치로 자라는 것이 아닌게,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서 어느 정도 발달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육은 경험을 많이 주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진국인 경험으로, 모든 교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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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어 수업을 한다. 2004년부터 학원에서도 했었고 과외도 했었고 학교에서도 했었다. 여기저기 보따리 싸고 다녀본 결과... 최악의 환경은 학교다. 짧은 수업시간(고등학교가 50분이니까), 많은 학생수, 천차만별인 수준, 현실과 동떨어진 교과서,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근무환경이 그 이유다. 나는 지난 학기 일주일에 18시간의 수업을 했다. 그 수업량이 많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1.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반 애들이 싸워서 얼굴이 퉁퉁 부은채로 교무실에 들어오질 않나(하루종일 애보는게 담임업무), 2. 툭하면 고장나는데다 반마다 천차만별인 기자재, 3. 이 선생님이 수업인지 아닌지 체크도 하지 않고 불러들이시는 관리자들, 4. 먼길오신 학부모님이 중간에 오시면 뛰어나가 어디 앉아계시라고 해야 하는 일 등등의 상황이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리나라의 공교육은 수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교사들을 동원하기 좋게 만들어진 다분히 행정적인 구조라는 점이다. 교실부터 봐라. 1-1, 1-2, 1-3. 어디에 영어 교과실이 있고 어디에 수학 교과실이 있는건지? 선생님들이라면 다들 이해하실거다. 애들이 수업들어오기 3분 전에 오늘 수업에 대한 내용을 화면에 띄워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수업의 도입이 쉬워질런지. 애들이 새로운, 영어라는 가면(혹은 랭귀지 아이덴티티)을 쓰고 '이제 영어시간이군. 영어실로 가자.'라고 하는 것과 멍 하니 자기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면 '영어 시간이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영어 선생님들이 실력이 없다고 싸잡아 묶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그들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급하다. 영어 선생님들? 영어 못하시는 분들 엄청 스트레스 받으시고 일찍 퇴직하신다. 명퇴하는 선생님들 중 영어 과목이 아마도 제일 많을거다. 그게 무슨얘기냐고? 까놓고 말하면 '우리도 안다'는 이야기다. 전공을 못하면 힘들다는거.

현재 행정적으로 올바른 구조인 학교를 수업에 올바른 구조인 학교로 바꾸는게 급선무다. 이 기계같은 학교에서 학생들도 지치고 교사들도 지치다. 그리고 판에박힌 구조를 전혀 바꿀 생각을 못하니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는 모든 면에서 중학교보다 수준이 높은 줄 안다. 많은 면에서 그렇긴 하다. 하지만 교과에서는 아니다. 특히 외국어에 있어서는.

아무튼, '인수위'의 '착각'은 사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예로, 교육과정평가원에서 영어 교과서를 수준별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학교에서 몇단어, 고등학교에서 몇단어 배워야하니 그 안에서 수준별로 다른 난이도로 만들겠단다. 그 말대로 만들어내서 고1 '하' 수준의 교과서를 펼치면 정말 수업이 될까? 내가 가르치는 애들처럼 중학교에서 내신 99%였던, 중1 교과서 수준의 영어도 읽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애들을 위해서는 이 애들 전공, 요즘 유행하는 미드, 스포츠, 패션 등등 뭔가 보고싶어할만한 교과서를 만들어봤음 좋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준별이 아니라 맞춤식 교과서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본 내가 여기서 내린 결론은, 몇몇 기관/모임에서는 쓸데없는 일을 가끔씩 한다는 점이다. 이 결론이... 틀린건가? '가끔씩' 이라는 말을 넣어 드려도 이 말에 발끈하려나?

아님 교과서는 내가 만들테니, 내가 수업들어가면 그 시간에 나 대신 부모님과 상대할 인력을 배치해주던가. 그게 안되면 최소한, 학교 폭력이나 인터넷 중독에 관해 설문지 돌려서 답안 갯수 세서 결과 보고하라고 하지 말고 설문조사 제대로 하는 회사에 아웃소싱해서 제대로 조사하고 제대로 결과 냈음 좋겠다. 도내 행사에 애들 데리고 나오라고 할거면 최소한 차량이라도 보내줬음 좋겠다. 인문계 위주의 교육과정 세미나 한다고 전문계에서 애들 구슬리며 빈 칸 10개 채우면 놀자~ 응? 이라고 말도 안되는 아양을 떨어야 하는 나를 한시간이나 걸리는 이런 저런 장소에 불러들이지 좀 말았음 좋겠다. 학습지 좀 여유있게 우아하게 그림 넣어서 만들어보자. 학교에서 걸어다니는게 내 소원이다. 맨날 뛰어다니느라 힘들어 죽겠다. 교사들이 문제라고? 연수 가서 선생님들이 모여서 이야기해보면, 특히나 최근 3,4년간 들어온 분들을 보면, 수업에 관한 고민도 많고 토익도 다들 만점에 가깝고 원어민과의 일상회화도 문제없고 미드도 그냥 보는데, 정말로 영어수업의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인건가.

나는 매 수업에서, 내 앞에 앉아있는 학생들과 영어로 놀고 싶고, 영어를 듣고 싶고, 영어를 통한 경험을 같이 하고 싶다. 그걸 할 수 있게 힘을 주는 곳이 별로 없다. 인문계에서 근무하게 되면 '수능'이 '깨부숴야 할 악'이며 동시에 '동기'가 되어 마음은 좀 편해진다고 하더라. 결국, '영어로 함께 경험하기'는 어디에서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금만 해보자고 학생들을 꼬드겨보고, 구연동화도 해보고, 잡지도 오려가보고, 영상을 편집하면서, 올해에도 나는 나를 구제할 방법들을 고민하고 있다. 목표는 두가지다. 내가 좋아하게 될 아이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영어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 것, 기계 안에서.


덧글

  • greenmovie 2008/02/13 22:46 # 답글

    너무너무 좋은 글이라 읽으면서 속에 있는 열불 함께 내고 박수도 함께 치고, 결정적으로 너무너무 추천하고 싶은데 이 글이 추천에라도 올랐다가 '지나가다' 이딴 놈들한테 도배 당할까봐 머뭇거린다. 혹은, 더 나쁜 댓글이 달릴까봐. 르미는 진짜 글을 잘써. 그리고 그 앞에, 르미 말이 옳아.
  • 행인1 2008/02/13 23:16 # 답글

    정말 좋은 글이에요~^^ 이런 것도 모르는 인수위 바보.
  • 나의르미 2008/02/14 01:38 # 답글

    greenmovie님// 비로그인 덧글이 안되서(지난번에 언니가 챙겨준 그 일 때문에) '지나가다'님의 덧글은 괜찮은데... 이 글은 그저 주절거림인걸요. 과찬이셔요.

    행인1님// 인수위는... 사실 원래 하는 일이 인수인계니까, 그걸 먼저 잘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 2008/02/14 09: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ylangylang 2008/02/14 15:19 # 답글

    동감..동감..동감!!!
    울컥 할 정도로 동감이라구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르미를 국회로!
  • 措大 2008/02/14 16:58 # 답글

    오오, 드물게 보는 정치적인 포스팅인걸요. ^^
  • 덧말제이 2008/02/14 20:18 # 답글

    르미님 최고! ^^b
  • 나의르미 2008/02/14 22:39 # 답글

    비공개님// 그렇게 좋으세요? 뻘쭘해요.

    ylangylang님// 울컥하는걸 보니... 영어 선생님이신가봐요(퍽!). 국회는 넘 멀어;;

    措大님// 아, 이런 것이 정치적인 포스팅이군요.

    덧말제이님// 안녕하셨어요? ^^ 과찬이십니다. (..)
  • 제절초 2008/02/15 07:58 # 답글

    문제는 예산입니다. 예산. orz 이놈의 예산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요. orz
  • 졸리 2008/02/15 09:13 # 답글

    저도 담임선생님의 강압(?)에 의해서 교단에 10번 정도 서봤는데요. (그래봐야 초등학교 2학년이었지만)
    제일 힘들었던 점이 아이들의 수준 차이와, 집중을 방해하는 환경, 그리고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어 평가 방법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인수위의 정책도 헛공산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고요. 학교를 떠나서 회사/사회에서도 영어가 사람의 지적수준/학습능력을 평가하는 공통 잣대가 되는 한 궁극적인 영어능력 향상은 어렵다고 봅니다. 외국어는 단순히 외우고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아니라, 꾸준히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와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느끼고 익혀야 하는 것이라서요. 게다가 요즘은 관심만 있으면 학생 스스로 익힐 수 있는 방법도 굉장히 다양하지요. 저는 인수위는 물론 교육정책을 만들고 시행하시는 분들이 좀 더 유연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으면 합니다. 영어교육의 문제는 사실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데, 영어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참 웃겨요.
  • dugong 2008/02/15 09:29 # 답글

    인수위는 제발 자기가 해야할일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 고즈넉 2008/02/15 16:14 # 답글

    우왕. 가슴으로 와닫아 버렸습니다 ㅎ

    그랬군요. '영어시간이다.' 라고 생각하고 앉아 있는것과 '영어시간이다. 영어 교실로 가자.' 라고 생각하는건 확실히 큰 차이가 있네요.

    퍼가도 되겠습니까. 출처 밝히겠습니다 ^^
  • 나의르미 2008/02/15 17:12 # 답글

    제절초님// orz. (나라나 개인이나 이놈의 예산;;)

    졸리님// 음. "집중을 방해하는 환경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방법"과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 중 하나가 학생을 교단에 세우는 것이지요. :) 훌륭한 학생이셨나봐요~

    차근차근 하나씩 나아져서 학생들이 좀 더 행복해졌음 좋겠어요. (..)

    dugong님// 그러게요.

    고즈넉님// 아이쿠,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퍼가시는건... 트랙백으로 해 주세요. ^^
  • incipit 2008/02/15 22:20 # 답글

    나의르미님 백만년만에 찾아뵙는군요. ㅠㅠ 근사한 글이었습니다. ^^
  • 야미 2008/02/16 02:21 # 답글

    르미님다운 글. 너무 멋진 글...그저 잘 읽었습니다
    이번의 들썩임은 인수위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영어에 대한 어떤 열등감이랄까 트라우마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듯해요
    르미님이 걱정하시는 것 말씀하시는 것 모두가 맞아요..마지막 문장이 실현되길 바라봅니다
  • 남궁훈 2008/02/16 07:17 # 답글

    영어교사들의 현실은 잘 모르지만, 쓰신 글은 참 공감이 가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졸리 2008/02/16 19:58 # 답글

    나의르미님, 제가 좀 불분명하게 썼나봅니다. 학부모 선생님으로서 교단에 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제 아들이 작년에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참으로 남다른 선생님을 만나서, 미국생활 경험이 있는 엄마들을 데려다가 주말 영어선생님을 시키셨거든요. 이름하여, 글로벌 위원회(좀 유치하죠?). 두 시간 연달아 수업을 하는 것이 처음엔 너무 힘들었는데, 40분 수업은 조용히 시키다가 끝나버리겠더군요. 15분 간격으로 테마별 수업을 하고 잠깐씩 쉬는 쪽이 초등들에게 적당하더라고요. 하다보니 나름 노하우도 생기도 목도 트이고 하였지요.
    저는 어린이책 출판기획자라 영문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거든요(번역도 간간이 하고 있지요). 기회가 되고 시간이 난다면 영문소설 독서클럽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 아직은 생각일 뿐이지만요. ^^
  • 나의르미 2008/02/16 20:09 # 답글

    incipit님// 꺄~ 잘 지내셨어요? 반가워요~

    야미님// 영어를 안해도 되는 분들은 영어 때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흑.

    남궁훈님// 반갑습니다~

    졸리님// 아아악~ 전 학생 때 그러셨다는 줄 알았어요. ^^; 초등학교 영어수업이라... 정말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 바라는 일들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 로얄제리 2008/02/20 02:53 # 답글

    공감해요 정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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