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2일 학교에서

26년 채우고 27년 시작하는 오늘 이야기.

1. 출근하자마자 어제 H군의 어머니가 4번이나(생일축하 아구찜을 앞에 둔 나에게) 전화해서 말씀하신 내용을 정리해 학생부에 보고. 워드로 정리해서 가니 학생부장 선생님이 읽으면서 파악을 빨리 하셨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드리고 그에 맞게 재심의를 요청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해야할 일이라 좀 걸린단다.

오후 2시에 오기로 했던 부모님이 오전 10시에 흥분한 학생의 외삼촌과 함께 오셔서 거칠게 항의하셨다. 나는 "나에게 하는 건의"와 "나의 대한 건의"를 잘 구분한다. 그래서 괜찮다. 괜찮다구!

...라고 말하지만, 흥분해서 말하는걸 계속 들어야 하다니, 이 직업 빡세다.

이번에 내가 한 실수는 '이러이러한 징계가 내려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점. 그 말보다 더한 징계가 내려지니 반발이 더욱 거세다. 앞으로 이런 언급은 절대 피해야겠다. 오늘 퇴근 후에도 전화가 오셨길래 "제가 실수했네요. 징계의 종류에 대해 말씀을 드리지 말걸 그랬나봅니다.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라고 했더니 당황하신다. 흥분해서 마구 도돌이표가 찍힌 끝없는 이야기에 진지하게 대응하니 맥이 풀리시는걸까?

..우리 사이에는 감상문보다 설명문이 어울리는거 아닌가요. 저, 아드님 친구 아니거든요.


2. 책상에 후배샘과 앞집샘이 선물을 놓아두셨다.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 두 명도 선물을 놓고 갔다. 1교시에 어학실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파일 폴더 하나를 공유 설정하려고 어학실에 가니 2학년 회화 수업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나 컴퓨터 1분만~!"이라고 들어갔다. 애들이 "생일 축하해요~"라고 외쳤다.

"Hey guys, it's Rmy's birthday. Let's sing the birthday song. Can you sing it?" Rob선생님의 지휘로 울려퍼지는 노래. 노래가 끝나고, 한 아이의 외침. "Y군을 선물로 드릴게요!"

"싫어."

노래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3. 무단 조퇴 - 점심먹고 집에 감 - 가 부쩍 심해진 K군의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류를 준비했다. 1학기 출석상황, 3,4,5,6월달 월별 출석상황, 생활기록부, 지금까지 받아둔 반성문 6개, 상담일지, 학기초에 낸 자기소개서 등등.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학생에게 이야기하지 마셔요. 제가 집에 가서 말씀드릴게 있어요. 퇴근은 몇시에 하세요?" 라고 물으니 밤 9시에 오라고 하셨다.

방향을 정하자... 이 아이, 끌어안아줄 사람이... 어머니는 "너 이럴거면 학교 그만둬!"라고 표현하실 스타일이니 나까지 그럼 안되겠다. 아버지는 뵙지 못해서 파악이 안된다. 객관적인 컨셉으로 가야겠다. 라고 정했다. 객관적이려면 선도규정도 들고가야지. 정보를 제공하고, 어머니가 밀치시면 내가 끌어안고, 어머니가 끌어안으시면 내가 빡빡한 모습을 보여야겠군.

...준비하다보니 내 마음에도 화가 뭉클.하고 솟아오른다. 원어민 선생님이 "모하는데?" 라고 묻길래 "에잇! 화나! 가만두지 않겠어! I will destroy him!" 이라고 했더니 허걱.한다. "그게 생일 계획이야?" "웅."


4. 퇴근 후, 눈병 때문에 병원갔던 반장 녀석이 "생일이에요? 밥사주세요."라고 문자가 와서 "몇 명이냐." 라고 했더니 4명이란다. "롯데리아로 20분 뒤에 와."라고 말하고 나갔다. 녀석들이 없다. 전화하니 옆건물에 들어가 있었다. 나를 만나기 직전이니 모여서 담배를 피운 것도 아닐테고(..) 녀석들은 왜 롯데리아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지 않는걸까? 그래도 되는데... 아무튼 애기들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데리고 들어갔다. 3번의 K군도 같이 있다. 순간 쳐다보기도 싫은 마음이 들지만, 이 아이도 내 새끼인걸. 눈을 마주쳐야해.라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워본다.

메뉴를 고르라고 했더니 모두가 "어린이셋트"를 먹겠단다. 어우 쪽팔려... OTL. 앉아서 리니지 이야기를 하고 -르미, 리니지2가 파티에 너무 의존하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강력히 주장-, WOW이야기를 하고 -모두가 캐릭터 외모가 무섭다는데에 동의-, 눈병과 징계 이야기를 하면서 버거를 하나씩 먹었다. 징계에 대한 애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노느라 바쁜 것일 뿐.

아놔. 근데 왜 난 눈병환자 사이에 앉았을까? (..)

가정방문 대상 학생이 쭈뼛거리며, "우리집 오실거에요?" 한다. "응." 했더니, 엄마가 오후에 전화와서는 화를 버러러러럭 내셨다고. 속으로 '으아아악 어머니. 화내실까봐 애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라고 했는데 협조 안해주시고 흑흑'이라고 생각하며 "그러게 왜 그냥 가버렸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니, 이 애들, 착한 애들. 아직도 어린이 셋트를 먹는, 아직 정신연령 9세의 애들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이 청소년이라는 희박한 증거: 4명 중 두 명은 요요대신 줄넘기 골랐음(쓰고나니 초등학생도 줄넘기는 하는구나;;).


5. 집에 돌아와 서류 챙기고 15분 거리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 좁은 거실에 부모님과 앉아 학생이 부모에 전하지 않은 출결상황을 전달. 징계 직전의 상황임을 아시고 부모님이 속상해하신다. 무단결이 이틀 있어서 혹시라도 가능할까 알아보고 있는 전학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것도 속상해하신다. 그러게. 전학보내는 것도 부모님 맘고생하시는 일인데 녀석이 왜 이리 도와주질 않는걸까.

화를 낼 때 내셔도, 화를 내서 해결되리라 생각하지 마세요. 잘 할거라 믿어주고 생활 속에서 오늘은 어땠니라고 물어봐주세요. 라고 말씀드리니, 애가 말을 안듣지 않냐고, 화를 내야죠.라고 하셨다. 화는 제가 낼게요. 제가 혼내고 반성문받고 원하시면 두드릴게요. 라고 하니 웃으신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쨌든 남다른 의미일텐데, 친구를 시켜서 아버지를 사칭해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병원 갔다고 한 일이 있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버님이 확실하게 대화해주셨으면 해요. 끄덕끄덕.

같은 중학교를 졸업해 몰려다니는 지금 친구들의 탓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기에, 절대 그건 아니라고 강하게 말씀드렸다. 아닌게 사실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화살이 돌아가는건 내가 절대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머지 서류야 보면 화만 나시니 제가 다시 들고 가겠습니다. 이건 드리고 갈게요."라고 말씀드리고 그저께 반성문으로 쓰게 만든 '부모님께 쓰는 편지'를 드리고 나왔다. '잘못했어요.'만 쓰고 퍼질러 앉아있길래 불같이 화를 내며 "사랑한다고도 써야지!"라고 갈궈서 400자 원고지 한 장을 겨우 채운 편지. 내가 그냥 가지고 있어봐야 학년말에 파기하는거 밖에 더 있겠나 싶어서, 어쩌다보니 원치않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까지... 르미 별걸 다한다.

집근처 큰길까지 데려다주면서 녀석은 말이 없다. "나 이 길은 알아. 이제 들어가봐."라고 하니 밝게 웃고 사라지는 녀석... 내일 늦기만 해봐라. ㅡ.ㅡ;


하아. 나이들기 힘들다. 오늘 하루도, 방금 다 갔다.

덧글

  • 파김치 2008/06/13 22:47 # 답글

    아, 수고하십니다, 르미 선생님:D
    학생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더이상 선생님을 볼 수 없게 되니까 선생님이 잘해주신 게 기억나요. 꺄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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