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않지만 익숙해져 가는 일들 학교에서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교직원의 90%가 아저씨(남자가 아니다)인 사립학교. 사립 인문계고는 뭔가 좀 빡센 분위기인데, 울 학교는 그나마 남녀공학이라 애교심에 호소하는 이벤트(라고 돌려 말해보자)가 별로 없었다.

행동은 털털하나 마음은 소심했던 평범한 나는, 여고시절이라고 흔히 회상하는 그런 여자애들만의 즐거움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 하는 짓이 이 학교 여고생스럽지 않아서 애들이 친해지기 싫어했던게 아닐까 - "공부만 했어."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모군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지도 않았고 - 공부가 먼가염? - 그냥 저냥 밖으로 나돌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스트레스 받을 요소를 찾아내는 존재. 결국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인 것이 인생인지라 나는 학교의 단점들을 마구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생님들이 너무 둔해!"라는 것이었다. 수업 내용을 열심히 들었다기보다는 선생님이 나에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혹은 티비를 본다고 생각하고 수업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게다.

...10년 후(?)

초짜 교사의 특징은 수업만 하는 거라고 한다. 나도 아직 그 레벨인데 - 게다가 이번 학기에는 내 수업의 구조에 무지하게 신경쓰고 있어서 딴데 신경쓸 정신이 없다 - 그건 열정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생들과 커뮤니케이션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은, 오후에 늘어진 애들을 보고 있자니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이야기를 던지는 것도 기술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발끈하는 마음이 생기면 최소한 그 학생은 잠은 안자는거군. 아아. 햇빛나는 따뜻한 겨울에 동물원에 온 기분이에요. 그 와중에 교과서의 내용은 "미국에서는 장례식에서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때로 더 좋고, 인도에서는 무지하게 운다."는 내용.

나는 학생이었을 때, 이런 내용을 다루었을 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까.

...단어. 미망인, 엉엉 울다, 장례식, 행렬... 평소처럼 한명 한명에게 학습지를 손에 쥐어주고 - 다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나눠주라고 맨 앞자리 학생에게 주면 선풍기 바람에 모두 날아가기 때문이다 - 침을 꿀꺽. "주제가 무거워보이죠.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에요. 몇몇 학생들에게는 마음 아픈 경험이 생각날 수도 있고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교과서의 내용이니 한번 읽어보는 것으로 할게요."라고 입을 열었다. 몇 개의 시선이 추가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5분이 남았다. 학습지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데 6명 정도가 널부러져있다. 펜도 없는 아이들.

"저는 영어교육 전공이 아니에요. 제 전공은 영어-국어 통번역이에요. 그런데 왜 교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게 되었을까?"

핸드폰을 몰래 몰래 만지던 무지하게 애교많은 애가 "저를 만나려구요!"라고 외친다. 어이구, 이쁘다.

"...동생들을 좋아해서 그래요. 물론 저는 여러분에게 저를 누나처럼 생각하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동생처럼 대할 수도 없구요.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린 여러분이 즐겁게 훌륭하게 어른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무척 이 일이 좋아요."

"결국 저를 만나기 위한거네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느새 다 일어나있는 아이들. "학습지 다 안채우면 가만두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해서 나머지 세 명도 결국 내가 모는 영어 버스에 탔다. 다 태우고 붕붕. 이렇게 오후 수업이 한번 더 무사히 지나갔다.

그,근데... 그 바로 이어진 옆반 수업에서는 나도 졸렸다능. 나머지 5분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틀었다는. 피아노도 괜찮지 않니 얘들아? (후다닥)


덧글

  • 의명 2008/09/10 01:12 # 답글

    르미님이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도, 저 소녀가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 나의르미 2008/09/12 00:13 # 답글

    의명님// 저 애교많은 학생,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라 더 이쁘..(퍽!)
  • 의명 2008/09/12 10:43 # 답글

    왜 저는 소녀라고 생각헀을까요(...).
  • 나의르미 2008/09/12 19:42 # 답글

    의명님// 이유야 많지요... 원하는 것만 보인다던가, 원하는데로 들린다던가, 원하는데로 읽힌다거나...(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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