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의 역할 요즘이야기

이달 초에 열다섯살 정도 어린 여자분과 대화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 연애이든 우정이든 결국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더라고. 그러니 사람들을 만나 듣고 대화하며 자신의 조각들을 발견하시라고. 물론 나도 이 대화를 통해 나의 조각을 다시 확인했다. 1. 조언하는 걸 엄청 좋아하는군. 2. 자기 에너지로 상대방에게 무언가 주고싶어하는 성격. 쉽게 말해 오지랖. 3. 그래도 살면서, 만남을 대충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연휴, greenmovie님과 대화하면서 시어머니는 왜 안부나 사소한 일들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지 않을까. 나는 이 분의 댁을 방문하니 와서 보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서 그렇다쳐도 이 분은 내가 어디 근무하는지나 아실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언니에게 물어보니,

"역할로 만났잖아."

라고 말한다. 역할이라니. 딸, 아내, 며느리, 직장에서의 직함 같은거요? 

"그게 전부인 사람도 있어. 그 사람하고는 그게 전부인거지."

뭐? 역할이 전부인 관.계? 역할이 할 일 목록을 만들 때 쓰는 지침으로만 중요한 줄 알았지 그것으로 인간관계를 전부 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명쾌한걸?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부모님이 역할 말고 성격이나 취향 등 사람에 관심을 많이 가지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같은 역할 고자를 키워내신것것일 수도 있고오. 직업 특성상 관계나 집단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없는 내가 생각하는 관계 요소는 역할/성격/동기/능력 이 네가지였는데 늘 성격과 동기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학생들은 일단 모두 같은 역할이고 능력은 성장할 테니. :)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새로운 개념을 배웠으니 적용해볼까. 내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완전 친해지거나 아님 서먹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도, 팬 아니면 안티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 것도 일정 부분 내가 '역할'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고 그게 관계에 반영되고 있었던 것. 만나는 사람들마다 재미있고 보는 것마다 신기해하는 성격이라서 미처 몰랐다. 어두운데 불이 들어온 느낌? (그런데 어두운데 불이 갑자기 들어오면 그 공간이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고 말이죠. 흠. 아오~ 이 잡동사니들.)

자아, 늘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로 모든 사회적인 장(Field)에 뛰어들었다고 되짚어보니, 그동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100% 서로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특히나 '역할'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분들은 내가 급진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비유하자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문을 벌컥 열고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우리집에서 현관문 없이 살았달까요... (부끄러웟.)

그런데 말입니다... greenmovie님과 내가 만약 역할로만 만났다면(스터디원), 또는 나와 나의 엄마가 역할로만 만났다면(공부해라, 밥줘요), 그건 싫은걸. 나는 역할의 의미를 모르는 바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용감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많은 만남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맺은 부모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는 정말 허심탄회하고 튼튼하다. 그리고 역할은 잘못하면 감옥이 될 수도 있어요. 1984를 생각해보세요. 좋지 않은 사회일 수록 역할을 강조한다고 생각해요. (소곤)

그러니 이번에 알게된 '역할'의 역할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리고 인사하는데 사용해야지. 조금은 천천히 시작해야지, 하고 올해의 새로운 만남들을 기대해본다.

마무리하려고 글 다시 읽다보니, 새학기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시집 걱정을 까먹었네. 지난 직장에서의 10년을 돌아보니, 역할에 대한 인식 부족을 열정(과 건망증)이 채워왔나보다. 부족한 천재성을 열정으로 채운다는, 남편이 처음 알려주었던 로맹 롤랑의 말. 이달을 마무리하는 말로 이걸 다이어리 한쪽에 적어놓아야겠다. 시집도 뭐, 부족한 무언가는 열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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